지구 온난화에 대응해 개발된 CW-7의 발포로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오고, 영원의 시간을 돌고 도는 기차 한 대 만이 살아남은 인류를 싣고 궤도를 달린다. 신의 영역을 교란시키려한 인간에게 경고하는 재앙인 듯, 지상의 모든 생명을 하얗게 얼려버린 설국 위를 도는 열차.

꼬리부터 머리 칸 까지 철저한 계급이 나뉘어져 하나의 거대한 생태를 유지하는 기차는 죽음을 상징하는 외부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안온한 벽이자 결국 ‘기차 안’이라는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유일한 세계를 지칭하며 이탈하지 않는 궤도를 달리고 있다.

17년 동안을 철저한 계급 사회의 최 말단에서 남루하게 살아온 커티스의 혁명 계획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이미 처음부터 한정된 기차 안의 혁명임을 포석으로 둔다. 명료하지 못한 혁명의 목적이 다만 앞 칸과 뒤 칸이 전복되는 것이라면, 결국 기차의 생태를 유지하는 사상도 궤도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은 영화의 시작부터 무력한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

비릿한 피를 수반하는 꼬리 칸의 혁명의 과정은 결국 자유의 이름 뒤에 누리고 싶은 앞 칸을 향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고, 무의미한 선로 위를 선회하며 탄생과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생태는 필연적이다. 결국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은 커티스 혁명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혁명은 꼬리 칸에 들어와 철저히 자리를 이탈하지 않길 피력하며 계급을 공고히 하려는 메이슨에서 부터 감지된다. 여성으로도 남성으로 보이지 않는 메이슨에게 사회주의 얼굴마담격의 캐릭터들의 연설 장면이 오버랩 되는 것은 기차를 억누르는 사상에 대한 극단적인 표출로 보인다.

그리고 앞 칸을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는 전문가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는 커티스와 함께 혁명에 동참하며 한 칸씩 앞으로 전진 한다. 메이슨을 인질로 수족관 칸에서 스시를 먹을 때 메이슨이 강조하는 단어는 ‘균형’이다. 그렇듯 한정된 자원으로 달리는 기차는 줄곧 모든 생명체에 절대적인 맹종과 엄격한 균형을 요구한다.

앞 칸으로 갈수록 화면은 다양한 볼거리들을 제공한다. 멸종이라는 설정과 대치되는 요소들에 일일이 부연설명을 하기보다 다양한 상징을 통한 시사점을 제공하듯 판타지적인 화면들이 동화처럼 펼쳐진다. 평화롭게 식물이 자라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 사상을 세뇌시키는 교실, 미용실과 사우나가 술과 마약으로 점철된 자본주의의 타락이 전진하는 커티스의 시선을 줄곧 따라간다. 크로놀에 중독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향락의 말로는 궁핍한 꼬리 칸의 죽음처럼 독약 같다.

그리고 커티스는 종내 엔진 칸에 당도한다. 그러나 커티스 앞에 나타난 윌포드는 엔진을 뺏기지 않으려는 절대 권력자이기 보다 엔진이라는 막중한 책임 아래 감정 없이 얼어버린 기계의 부속처럼 무력하다. 엔진을 차지하고자 질주한 커티스에게, 어쩌면 허탈하게도 엔진을 책임 져 주길 부탁하며 자기연민의 페이소스를 앓는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혼동을 주기 충분했던 것 같다. 어쩌면 뚜렷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던 혁명의 과정이 거대 엔진 앞에 홀로 선 커티스에게는 더욱 희망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엔진을 차지하기 위해 앞 칸으로 침투한 커티스와 반대로 남궁민수가 닿고자 했던 세계는 달랐다. 변화는 희망을 가진 자에게 감지되듯 외부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던 남궁민수에게 기차 밖의 세계는 이미 조금씩 변화의 기별을 예고했다. 문을 부수려 하는 남궁민수를 미쳤다고 말하는 커티스의 두려움은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하는 남궁민수의 혁명과 대치되고, 남궁민수의 혁명은 더욱 진보적인 당위성을 품었다.

죽음의 외부에서 생명을 지탱해주는 안온한 벽을 문으로 본 남궁민수, 그리고 기어이 벽의 폭발과 함께 기차는 17년을 돌고 돌던 선로를 이탈한다. 줄곧 기차 안을 상기시키는 구조 속에 허무를 수반한 커티스의 혁명 과정은 기차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비로소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 해방감을 만끽한다.

폭발한 기차의 생존자들로 그려지는 트레인 베이비 요나와 타미에게, 기차 밖의 세계는 이들의 탄생시점 부터 미지의 땅이었다. 공간의 탈주라는 부분에서 사상의 변화가 아닌, 단지 물리적 환경의 변화를 패러다임으로 간주해야 하는 점이 아주 개운하지는 못하지만 죽은 시간의 선로를 벗어난 것만으로 문 밖의 세계는 희망적이다.

북극곰, 생명의 탄생이 감지되는 기차 밖의 서사는 어쩌면 이미 보편적인 사상에 익숙한 우리의 상상이 닿지 못하는 결말이자, 광활한 가능성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설국,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는 순백의 캔버스와 같은 미지의 세계로 그곳으로 관통하는 희망의 문은 어쩌면 이미 우리 가까이 안온한 벽으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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